탄소중립, 산업 전환의 변수는?
[에너지신문] 탄소중립은 이제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제도와 규범으로 굳어졌다.
그 결과 기업의 비용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손익계산서에는 설비 투자와 인건비에 더해 탄소 비용이 새 항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있다.
CBAM은 2023년 10월부터 2025년까지를 전환기로 운영하고, 2026년부터는 금전적 정산을 수반하는 본격적인 시행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핵심 원리는 분명하다. 수입 상품이 생산 전과정에서 배출한 이산화탄소 양만큼 CBAM 인증서를 구매해 반납한다. 인증서의 가격은 유럽연합(EU) 배출권 거래 제도(ETS)의 주간 평균 경매 가격을 따른다.
현재는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력, 수소와 일부 하류 제품이 대상이며, 향후 적용범위가 단계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
제도는 산업 정책이자 무역 규범으로 기능한다. 에너지 구성과 연료 선택, 공정의 열 수지 같은 ‘에너지의 선택’이 곧 무역 경쟁력의 변수가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근 EU는 이른바 ‘옴니버스 간소화 패키지’에 대해 정치적 합의를 이뤄 기업의 절차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26년분에 대한 분기별 선매입 의무를 2027년 2월로 미루고, 분기말 인증서 보유 비율을80%에서 50%로 낮추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다.
연간 신고와 반납 기한 역시 일정에 여유를 주는 방향으로 조정이 검토 중이다. 이러한 제도 환경 속에서 한국 기업이 어떻게 적응하고, 위험을 관리하며,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을지 점검해 보고자 한다.
CBAM의 등장으로 공장의 실제 운영 데이터가 그대로 무역 서류에 반영된다. 전력의 탄소 강도와 설비의 가동률, 정지와 재가동 과정에서 생기는 효율 저하, 제품 규격별 불량률 같은 지표가 서로 연결돼 내재 배출을 설명한다.
같은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전기로 중심의 체계를 갖추고 재생에너지 전력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기업과 노후한 열원을 유지하며 탄소집약적 전력에 의존하는 기업의 결과는 크게 다르다. 보이지 않던 차이가 데이터로 드러나고, 그 데이터가 시장에서의 위치를 바꾼다.
첫 관문은 정확한 측정과 검증이다. 공정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명확히 정하고, 원재료에서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배출을 추적해야 한다.
계측기의 정확도와 보정 이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문서화하며 시간대별 전력과 열 사용 기록을 생산량, 설비 가동률, 유지 보수 기록과 논리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협력업체와 하도급 단계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 표본 조사 계획을 운영하면 전체 공급망의 데이터 신뢰도가 높아진다.
전환기에는 일부 기본값을 활용할 수 있지만 실제 데이터를 가진 기업이 전반적으로 더 유리하다. 실측과 검증 체계를 서둘러 갖출수록 행정 부담과 시행착오가 줄어든다.
배출감축은 거대한 설비 교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선 공정 조건을 세밀하게 조정하고 운영 표준을 재정비하는 것만으로도 빠르고 확실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열 교환기의 오염을 관리하는 주기를 조정하고, 압축기와 배관에서의 누설을 줄이며, 야간 저부하 운전을 최적화하면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다음 단계로는 열 회수 설비를 보강하고, 저온 폐열을 활용하며 단열을 개선해 열 손실을 줄이는 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연료전환과 전력 조달 전환이 뒤따른다.
석탄이나 중유 중심의 체계에서 가스로 옮겨 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재생에너지 전력의 직접 조달이나 간접 조달을 늘리며, 공정별 전력 사용을 분산해 피크를 낮추면 전력의 탄소 강도와 운영 부담을 함께 줄일 수 있다.
신기술의 도입은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수소 혼소와 같은 시도를 통해 공정 적합성을 확인하고, 이산화탄소의 포집과 활용, 저장(CCUS)을 시범 규모로 적용해 기술적 과제를 점검한다.
필요한 곳에서는 공정 전기화를 추진하고 고효율 열원으로 전환해 전체 에너지 구조를 개선한다. 모든 선택지는 감축 효과와 실행 난이도, 조직의 준비 수준을 함께 고려해 우선순위를 정하되, 먼저 손에 잡히는 조치부터 실행해 성과를 쌓는 전략이 필요하다.
업종별로 보면 공통의 원칙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선 철강산업은 전기로 비중 확대가 방향이지만 속도는 전력의 탄소 강도와 가격, 품질이 좌우된다. 가스와 열 회수 개선, 재생에너지 전력 조달, 고철 등급화와 불순물 관리는 즉시 감축과 원가 절감에 직결된다.
중장기 해법은 수소 환원 제철로, 초기에는 가스 기반 직접 환원에 수소를 혼입해 전기로와 결합하고, 청정 전력과 수소망, 적합 원료가 갖춰지면 전량 수소 환원으로 확장한다.
시멘트산업은 클링커 비율 조정과 대체 연료 도입이 핵심이다. 칼시네이터 구간에서의 포집은 배가스 조성, 온도, 습도에 맞는 흡수제와 용매 선택이 중요하다. 원료의 예열 효율과 분진 회수 시스템의 성능 개선은 비교적 빠르게 성과를 내는 조치다.
알루미늄산업은 전력 집약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전력 조달 전략이 곧 탄소 전략이다. 재생 알루미늄 비중 확대, 스크랩 회수와 등급별 분류 체계의 정교화, 전해 공정에서의 내화물과 흡착제 수명 관리는 배출과 비용을 동시에 낮춘다.
비료산업의 본질은 수소의 전환이다.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만 기다리기보다, 과도기에는 저탄소 수소를 교량으로 활용하고, 인증과 원산지, 전력 추적성의 세 축을 맞물려 관리해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
CBAM 등장, 공장 운영데이터로 기업 서열 재조정
新 글로벌 무역질서 CBAM, 에너지 전환 ‘생존 곡선’
이 모든 변화가 현장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조직과 절차가 받쳐줘야 한다. 공정과 품질, 설비와 에너지 담당이 같은 지표와 같은 용어로 소통하도록 공통 지침을 마련하고, 협력업체와는 공동의 개선 과제를 정해 데이터 품질을 함께 끌어올린다.
제도 변경이나 기술 일정의 변동 같은 불확실성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므로, 내부 점검 주기를 정해 작은 문제를 일찍 발견하고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차원에서는 주관 부처의 일원화, 계측과 보고, 검증 및 데이터 표준을 전담하는 기관의 지정, 에너지와 탄소 데이터를 통합하는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이것은 기업의 보고 비용을 낮추고 정책 간의 정합성을 높인다. 공공 조달과 탄소 차액 계약(CCfD)을 통해 초기 수요를 창출하고, 세제와 금융 지원으로 투자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
성과 지표는 단순한 국산화율이 아니라 외부와 비교 가능한 상대 지표여야 한다. 예를 들어 ‘주요국 대비 기술 수준 90% 달성’ 혹은 ‘기술 격차 2년 이내’와 같은 지표는 산업화의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한다.
또한 국내 전력의 탄소 강도를 낮추기 위한 전력망 투자와 계통 보강, 입지와 인허가의 예측 가능성 제고는 민간 설비 투자와 바로 연결되는 기반 과제다.
CBAM은 단순한 새로운 관세가 아니다. 에너지와 무역, 데이터와 금융이 얽혀 작동하는 새로운 무역 질서다. 승자는 데이터를 먼저 확보하고, 에너지 전환을 서둘러 실행하며, 정산과 위험 관리를 계약과 금융의 언어로 설계하는 기업이다.
오늘의 표준과 기록, 내일의 작은 투자와 실험, 다음 분기의 계약과 정산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때 비용 곡선은 바뀐다. 그 곡선이 바로 에너지와 무역이 만나는 자리에서의 생존 곡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