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에너지신문] 정부가 2018년 대비 53~61% 감축을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로 최종 확정했다. 9~10월 공개토론과 11월 6일 공청회를 거쳐 위원회 의결·국무회의에서 공식화됐고, 기준연도 배출량(742.3MtCO₂e)도 함께 명시됐다.

숫자만 보면 “목표 상향”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정책의 가치는 숫자가 아니라 ‘경로’와 ‘이행’에서 판가름난다. 현재의 국가감축목표는 세 가지가 부족하다.

첫째, 범위형 목표가 문제다. 53~61%라는 폭은 정치적 여지를 남길 뿐, 시장은 통상 하한(53%)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단일 수치와 함께 2050년까지 매 5년의 연차별 탄소예산을 못 박고, 편차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목표를 상향 조정하는 자동 조정 장치로 바로잡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목표가 아닌 경로의 신뢰성이 자본을 움직인다.

둘째, 전력 전환의 ‘지도’가 비어 있다. 재생에너지, 기존의 원전, 저탄소열을 포함한 현실적 전원믹스를 제시하고, 송전망 증설(몇 km), 변전소 용량(몇 MVA), 저장(몇 MWh), 수요반응(DR) 목표(몇 MW)를 연차별 지역별 목표를 공개해야 한다. ‘어디에, 무엇을, 언제까지’가 안 보이면 기업과 금융이 움직이지 않는다. 정부도 전력, 산업, 건물, 수송 등 부문별 수단을 열거만 했지, 구체적 목표를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셋째, 산업의 공정전환은 구호가 아니라 ‘프로젝트 파이프라인’이어야 한다. 철강(수소환원), 시멘트(클링커 감축·대체연료), 석화(전기화·열회수), 반도체·배터리(무탄소 전력 조달) 등 업종별 최적가용기술(BAT) 보급곡선을 공개하고, 이를 지원할 정책금융, 보증, 세제, 그린프리미엄등을 패키지로 설계해 톤당 감축 성과에 따라 차등 지원해야 한다. 선언 대신 라인 교체 일정표와 자금 구조가 필요하다.

여기에 두 축이 더해져야 한다. 하나는 수요 관리다. 전력 전환이 버티려면 상용차 전동화 전용 인프라, 철도와 해운 전기화, 건물의 심층 리트로핏과 성능기반 보조금, 스마트 계량기와 수요 반응 의무화 등을 통해 피크 수요를 줄여야 한다. 다른 하나는 돈의 흐름을 저탄소로 전환해야 한다. 예산서에 기후예산표시(라벨링)를 적용해 감축, 적응, 중립, 유해(화석연계) 등을 구분해 집계하고, 효과 낮은 지출은 줄이고 효과 높은 곳은 늘려야 한다. 정책금융에는 전환 전용 창구를 열어 금리와 보증을 우대하고, PPA와 REC 관련 규칙을 간소화하며, 기본녹색요금제 같은 디폴트 설계로 수요를 자동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지 비로소 민간투자가 “자동으로” 저탄소로 쏠린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축이 공정전환이다. 탄소집약 산업과 지역의 일자리와 세수 감소 충격을 완충하려면 공정전환 보드를 상설화해 재교육과 전직, 임금보전, 지역산업 재배치, 사회안전망 등을 패키지로 집행해야 한다. “누구도 뒤처지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수사(修辭)가 아니라 예산·제도로 보증돼야 한다.

거버넌스도 재정의가 필요하다. 이름을 바꾼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가 전환의 엔진이 되려면 △경로관리자로서 탄소예산과 부문 곡선을 확정·관리하고 편차 발생 시 자동 조정을 발동할 권한 △데이터 허브로서 월·분기 투자 대시보드와 배출·계통·인허가 지표를 공개하는 투명성 △재정 조정자로서 기후예산표시와 화석 연계 보조금 전환, 정책금융의 전환 슬롯을 총괄 조정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UNFCCC NDC 레지스트리 등록, 국제 공동투자, 표준 상호인정, Article 6 등 국제적 동원능력을 결합해 비용을 낮추고 속도를 높여야 한다.

숫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숫자가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때 우리의 미래를 이끄는 나침반이 된다. 이번 NDC가 진짜 나침반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더 높은 수치를 외치기보다 실질적 전환을 가져올 더 선명한 경로와 더 신속한 실행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실행을 담당할 기관, 바로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가 저탄소 전환의 길잡이가 돼야 한다.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 가능한 계획과 집행, 그리고 그에 맞춘 거버넌스다. 위원회가 이 세 가지를 잘 조율할 때 자본은 흘러들고, 전환은 선언에서 실천으로 옮겨갈 것이고, 우리나라도 비로소 기후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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