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에너지신문] 지난 7월 23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역사적인 권고적 판결을 내렸다.
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Banuatu)가 제기한 이번 사건에서 ICJ는 만장일치로 “모든 국가는 기후 시스템을 보호할 국제법적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하면 피해국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화석연료 탐사 허가, 보조금 지급, 과도한 생산과 소비가 기후에 해를 끼치는 경우 이는 ‘국제적으로 위법한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명시했다.
이번 판결은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기후위기 대응은 주로 파리협정과 같은 국제 기후협약의 틀 안에서 논의됐다. 그러나 파리협정은 자발적 성격이 강하고 구속력이 약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ICJ는 이번 판결에서 파리협정만이 기준이라는 강대국의 기존 주장을 배제하고, 기후위기 대응 의무는 일반적인 국제법 체계 내에서 도출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즉 관습국제법, 인권법, 해양법, 환경 관련 조약 등 다양한 국제법적 근거를 통해 국가들이 기후 시스템을 보호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상 의무라는 점을 국제 최고법원이 확인한 셈이다.
이 판결은 피해 복원이 불가능할 경우 금전적인 배상도 가능하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이는 기후변화로 피해를 입는 국가들이 주요 배출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예를 들어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잠식되고 있는 태평양 도서국이나 사막화로 식량 위기에 직면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온실가스 다배출 국가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각국의 법원에서도 이번 판결을 권위있는 기준으로 삼아 정부의 기후정책을 심판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다.
이번 ICJ의 판결은 지난해 한국 헌법재판소가 내린 탄소중립기본법 일부 위헌 판결과도 맞닿아 있다. 헌재는 2024년 5월 정부가 과학적 근거없이 행정부 재량으로 설정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국민의 생명권과 환경권을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파리협정의 1.5℃ 목표와 국제사회가 제시한 과학적 기준에 비춰볼 때 현행 목표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국가가 기후위기에 대응할 헌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번 ICJ 판결은 이러한 흐름을 국제법 차원에서 확장하며, 각국의 기후정책이 국내외적으로 더 강력한 법적 감시를 받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ICJ는 화석연료 산업에 대해서도, 화석연료 탐사 허가, 생산과 소비 촉진,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기후에 악영향을 미칠 경우 국제법상 위법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국가뿐 아니라 화석연료산업 전체를 겨냥한 강력한 경고다.
글로벌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이 탄소집약적 산업에 대해 더욱 엄격한 리스크 프리미엄을 적용하고, 기업과 정부 모두 화석연료 중심 정책을 재검토해야 하는 압박이 커질 것이다.
향후 국제기후 협상에서도 판결의 파장은 클 것이다. 손실과 피해(Loss & Damage) 기금 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기후 피해국은 이번 판결을 근거로 기여국 확대와 배상 책임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고, 주요 배출국과의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기후위기 대응이 인권 문제이자 법적 금전적 책임의 문제로 재정의되는 흐름도 뚜렷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 정부와 기업도 대응을 서둘러야 한다. 정부는 탄소중립기본법과 관련 제도를 ICJ 판결의 기준에 맞춰 강화해야 한다.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화석연료 보조금 체계를 개편하고 석탄발전 감축 로드맵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취약국으로부터의 국제 소송리스크에 대비해 법적·외교적 대응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과제도 결코 가볍지 않다.
온실가스 배출저감을 공급망(Scope3)까지 확대해야 하고, 화석연료 탐사나 고탄소 자산 투자에 대한 법적리스크를 ESG 리스크 관리 체계에 반영해야 한다. 기후적응 투자, 탄소배출권 활용, 에너지 전환 비즈니스 모델 등 선제적인 기후 금융 전략을 준비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이번 판결은 이른바 ‘기후면책(climate impunity)’ 시대의 종식을 선언한 것과 같다. 피해를 입은 나라와 국민들이 가해국을 상대로 국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나라는 더이상 기후위기 대응에서 소극적 자세를 취할 수 없다. 이번 ICJ 판결을 법적 경고이자 행동 촉구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국제법정에서 책임을 묻는 목소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