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5. 전력산업의 발전 방향 (상)

2001년 한국전력 결국 7개 기관으로 분할

2000년 한수원-5개발전사-전력거래소로 분할
노무현 정부 들어와 배전분할 재논의 분위기
현정부 분할재조정 시도, 현재 진척사항 없어

전력산업 구조개편 10년이 지났다. 2001년 4월 한국전력 발전부문이 화력발전소 5개사, 수력원자력 1개사, 전력거래소로 각각 분할됐다. 정부는 2단계로 배전부문 분할을 시도했으나 전국전력노동조합의 반대로 2003년 추진을 하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9월15일 블랙아웃 직전까지 가는 전력대란이 발생했다. 이에대한 원인분석과 책임공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정부가 잘못한 것인지, 단지 몇몇 전력책임자의 잘못인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진행과 관련,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사를 시리즈로 독점 게재한다.  /편집자 주 

많은 논쟁을 뒤로하고 한전은 2001년 4월 1일, 모두 7개의 기관으로 분리됐다.

발전부문은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와 화력발전사 5개로 독립했고 전력시장과 계통운영을 위해 한국전력거래소가 사단법인으로 탄생했다.

한전분할과 민영화 추진

한국전력공사는 전력거래소를 제외한 6개 발전회사 지분을 100% 소유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송배전 기능만 가진 절름발이 전력회사가 됐다.

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2002년부터 화력발전회사들을 순차적으로 민영화한 후 2009년에 이르면 한전의 배전부문을 6개 정도로 나눈 후 전력도매시장에서 완전경쟁을 이루겠다고 했다.

영국에서 이미 폐기된 도매시장 거래와 캘리포니아에서 대실패를 경험하는 그 순간, 우리나라는 시대착오적인 전력산업 완전경쟁을 위한 늦은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첫 출발부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한전에서 분리된 5개 화력발전자회사의 노동자들은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이라는 산별노조를 결성했고 2002년 2월25일, 같은 민영화의 운명을 겪고 있던 가스와 철도 노동자들과 함께 총파업에 돌입했다. 가스노조와 철도노조가 파업을 철회한 후에도 발전노조는 장장 38일 동안 전무후무한 조합원 산개투쟁으로 파업을 이어갔다.

발전노조의 파업은 당시 매각대상 1호로 정부가 지정한 남동발전주식회사 매각에 큰 타격을 입혔다. 미국계 몇몇 회사가 남동발전 매입을 검토했지만 파업 여파로 일정 자체가 지연되고 강성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회사 인수에 난색을 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를 넘기고 2003년이 되자 매각은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전력사태의 주범 중 하나로 지목된 엔론이라는 에너지전문기업 고위층이 탈세를 비롯한 많은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되고 캘리포니아 사태의 여파로 많은 지역에서 전력산업 자유화 자체가 취소되거나 중단됨에 따라 매각 발전소를 인수했다.

단기적으로 경영성과를 올린 후 되파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려가던 에너지기업들의 도산이 줄을 이었다. 말 그대로 시장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한 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이던 발전소 인수전쟁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전력노조와 노사정 공동연구단

송배전 회사로 전락한 한전의 노동자들은 무너진 전력노조를 새로 세웠다.

2002년 5월에 치열한 경선 끝에 들어선 김주영 집행부는 전력산업구조개편의 두 번째 단계였던 배전부문 분할 문제를 노사정 공동으로 논의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과감한 제안을 했다.

김대중 정부에 비해 공기업 민영화에 비판적이던 노무현 정부는 전력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사정위원회 산하 공공부문민영화 특별위원회에 배전분할 문제를 다루는 노사정 공동연구단을 구성했다.

연구단은 구조개편 찬성진영, 중립진영, 그리고 반대 진영에서 추천한 각 두 명씩의 전문가로 구성됐고 2003년 9월부터 2004년 5월까지 문헌연구, 현장방문, 관련 전문가 면접, 해외 조사를 통해 배전분할 추진 여부를 논의했다.

필자는 공동연구단의 해외 현장조사 일정을 짜는 과정에 참여, 전력산업 자유화 실패가 컸던 사례국들의 방문기관을 섭외했고 정부와 한전은 반대로 성공사례라고 판단되는 해외방문지를 추천했다.

약 8개월 간의 활동 끝에 같은 해 5월 말, 공동연구단은 내부 논의 끝에 최종 결론을 도출했다. 최종결론 논의 과정에서 정부측 추천인사 두 명이 끝까지 반대하기는 했지만 전력노조가 추천했던 반대측 전문가 두 명과 중립측 전문가 두 명 등 모두 네 명이 배전분할 중단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리고 노사정위원회에 보고했다.

이 문제는 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청와대 내부 회의에 보고됐고 고 노무현 대통령은 연구단의 최종결론을 수용함으로써 배전분할 추진은 중단됐다.

한국 정부의 배전분할 중단 결정은 비슷한 구조개편을 추진하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게 됐는데, 특히 노사정이 함께 참여한 연구와 토론 끝에 내려진 구조개편 중단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MB 정부의 한전통합 논의

구조개편의 두 번째 단계배전분할이 2004년에 중단되면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노조는 지속적으로 한전 재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민영화 반대 전문가 그룹과의 토론회 개최, 국제심포지엄 개최, 해외 구조개편 실패사례 조사, 국제연대활동 등을 해왔다.

그런데 전력산업 재통합과 관련된 논의는 뜻밖의 시점에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2008년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안고 탄생한 이명박 정부가 바로 그 진원지였다.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이라는 모토 아래에서 공공기관을 혁신의 대상으로 보며 공공기관 선진화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전력산업에서는 예외였다.

당시 청와대 내부에서 실세로 분류되던 수석비서관실 중 한 곳에서 한전을 다시 하나로 합쳐서 과거의 브랜드 파워를 회복함으로써 좁은 국내에서의 무의미한 경쟁을 그만두고 넓은 해외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서 전력노조의 협조를 요청했다.

전력노조는 전력산업 재통합이 우리나라 전력산업을 다시 세우는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하며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의 촛불사태에 이은 전면적인 청와대 수석비서관 교체로 이 논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KDI 보고서와 전력산업 발전방안

2009년 가을에 열린 지식경제부 국정감사에서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거의 모든 의원들은 전력산업 분할정책의 실패를 강조하며 한전을 중심으로 하는 전력산업 재통합을 요구했다.

여야를 막론한 의원들의 강력한 요구에 당시 최경환 지식경제부장관은 믿을 만한 외부 전문기관의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 하겠다고 약속했다. 국정감사가 끝난 후 지경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정식으로 전력산업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당초 KDI는 2010년 봄에 발표하기로 했던 연구결과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계속 발표를 미루었다.

마침내 2010년 6월말 ‘대내외 여건 변화에 부응한 전력산업구조 정책방향 연구’라는 제목으로 최종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지금까지의 발전경쟁을 통한 효과는 입증 됐기 때문에 도매경쟁을 계속 유지해야 하며, 중장기적으로 한전의 소매부문의 개방을 통항 경쟁체제 구축도 필요하다고 돼 있었다.

예상 보다 몇 달 늦게 발표된 최종보고서의 내용이 당초 연구 시작의 원인이었던 발전경쟁 무효론과 한전 재통합에서 벗어난 결과로 나오자 전력노조는 즉각 반발했다.

전력노조는 성명서를 통해 이번 연구결과가 구조개편 정책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정부의 압력에 KDI 연구진이 굴복한 왜곡된 결과라고 성토하면서 노조간부 중심으로 KDI 항의집회를 개최하는 등 강력하게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특히 최종보고서 발표 직전 모 일간지는 KDI가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최종보고서 발표가 늦어졌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입김에 따라 보고서가 왜곡됐다는 보도를 하면서 보고서를 둘러싼 논쟁은 뜨거워졌다.

이 과정에서 지경부는 자신들이 절대로 외압을 행사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고 KDI 연구자들 역시 정부로부터의 어떤 압력도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이 말들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식경제부는 이런 논란 속에서도 KDI 보고서를 토대로 전력산업 정책 발전 방안이라는 내용의 정책발표를 했다. 이 방안은 KDI 보고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또다시 전력노조를 비롯한 많은 반대세력의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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