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신문] 김신종 고려대학교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는 행정고시 22회 합격 이후 산업자원부 및 환경부 등에서 오랜 기간 공직에 몸담았던 에너지 분야의 전문가다. 본지는 에너지의 기원에서부터 미래 에너지 전망에 이르기까지 김신종 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는 ‘김신종의 에너지 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주

▲ ▲ 김신종 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 김신종 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고대 슈메르, 앗시리아, 바빌론인들도 지표나 얕은 땅속에서 발견한 석유를 등화나 약용 등으로 사용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자본·기술·노동이 결합된 거대 석유산업이 출현해 범용화 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티투스빌에서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가 ‘수직굴착 시추기’를 발명, 하루 1m씩 파내려가 지하 23m 땅속에서 석유지층을 발견했다. 역사상 최초로 파이프를 사용한 기계식 시추였는데, 법률가 조지 비슬과 은행가 제임스 타운센트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석유는 하루에 45배럴 정도씩 나왔으며 가격은 당시로선 고가인 배럴당 40달러였다. 이로 인해 펜실베니아주는 일약 각광을 받았고 1861년 영국으로 수출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석유수출 사례였다.

남북전쟁 기간 중인 1863년 존 록펠러는 위험부담이 큰 석유개발사업 대신 하루 10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설립하고 이후 계속 규모를 확장했다. 1870년에는 유통업까지 업역으로 하는 스탠다드석유회사(Standard Oil Co)를 창립했다.

이후 군소 정유회사들을 흡수·합병하며 확장을 거듭한 이 회사는 1879년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등에 수출하며 단기간에 세계 석유시장을 석권했다. 1890년 ‘셔먼 반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면서 스탠다드는 34개의 석유회사로 분할됐으나, 이중 상당수가 후일 ‘석유메이저’로 발전했다.

1901년 텍사스주 버몬트에서 앤소니 루카스가 ‘회전굴착 시추기(Rotary bit)’를 발명했다. 이는 석유개발과 산업화에서 최대의 발명으로 평가된다. 이때에도 자본가의 지원이 있었다. 회전 비트의 강력한 힘으로 파이프는 130m의 사암층을 무사히 통과, 지하 268m에서 일산 10만배럴의 대형유전을 찾아냈다.

이후 미국 북부 스탠다드석유회사의 독점시대가 끝나고, 남부에서도 걸프오일(Gulf Oil), 아모코(Amoco), 험블(Humble)과 같은 석유 자이언트가 탄생했다. 1905년 오클라호마주의 털사와 캘리포니아주에서도 대형유전이 발견됐으며, 1930년에는 텍사스주 동부 킬고어(kilgore)의 일산 50만배럴 초대형 유전으로 이어졌다.

1890년 로얄더치사가 인도네시아 동스마트라에서, 1908년 앙글로-페르시아사(오늘날 BP사)가 이란 남부 사막지역에서, 1910년 영국인 위트만 피어슨이 멕시코 탐피고(Tampico)에서 유전을 발견하는 등 1900년대 들어 미국 이외 동남아, 중남미, 중동 등에서도 대규모 유전들이 속속 발견됐고, 원유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중동지역은 1908년 이란에서 슬레이만유전이 처음 발견됐지만, 1930년대부터 미국회사들에 의해 개발이 본격화됐다. 앙글로-페르시아사가 도외시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938년 담맘유전, 1948년 세계 최대의 가와르유전이 발견됐다. 21세기 초 세계 유전의 석유매장량은 약 1조 1477억배럴(약 1563억톤)이며, 중동지역 63.3%, 북미지역 6.1%, 중남미지역 9.1%, 유럽지역 1.8%, 구소련 6.2%이다. 그리고 가채년수는 중동지역이 평균 88.1년인 반면 중동이외 지역은 21.3년에 불과하다.

카스피 해역의 석유매장량은 전세계 매장량의 약 1/5인 2700억배럴, 가스매장량은 1/8인 665조 입방피트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동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일찍이 이곳의 석유·가스를 1879년 노벨형제가 개발했고, 로스차일드가가 이 지역 석유사업에 뛰어들어 바쿠에서 생산되는 러시아산 석유를 철로로 흑해 항구인 그루지야의 바툼으로 운송, 세계에 공급했으며 영국의 사무엘은 석유 운송에 중점을 두고 셸(Shell)사를 설립해 바쿠의 석유를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통해 배로 운반, 아시아 시장을 공략한 바 있다.

카스피해는 내해(內海)여서 이곳에서 생산되는 석유와 가스를 지중해, 흑해, 걸프만, 인도양 등으로 보내려면 파이프라인을 통해야 하는데 1991년 USSR해체 이후 서방측과 러시아측간에 이를 둘러 싼 알력이 있어 왔다.

석유산업에서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는 2차 세계대전 이전 중남미 지역에서 미국계 메이저의 지배에 대항한 현지 정부의 국유화 형태로 나타났다.
1922년 아르헨티나에 이어 1938년에 멕시코가 석유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중동지역에서는 이란이 1951년에,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1975년에 각각 국유화를 선언했다. 베네수엘라도 1975년에 국유화 대열에 동참했다.

이보다 앞선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창설됐다. OPEC은 메이저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력을 장악하고, 자원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산유국의 국영석유회사는 상류부문(석유개발)의 운영능력과 기술부족으로 여전히 메이저 의존을 피할 수 없었고, 특히 하류부문(정제 및 판매)에서 메이저의 독점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한편 자원민족주의는 새 유전 개발을 촉진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알래스카 노스 슬로프 유전과 북해유전 등 초대형 유전이 발견됐는데, 매장량은 전자가 100억배럴, 후자가 130억배럴로 추정된다.

나아가 금세기 들어 초(超)고유가 시대가 도래하자 메이저들 간의 M&A가 활발히 일어나 ‘슈퍼메이저’가 등장했는데 기술과 자금,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산유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심해저, 극지, 오지 등 미개척지 석유개발 투자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산유국도 OPEC을 중심으로 고유가 유지정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카스피해 등 유망지역은 진입장벽을 높여가면서 자국 국영석유회사를 우선시하는 투자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고유가로 다시 촉발된 자원민족주의가 앞으로 석유개발과 투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으며, 또한 우려되는 상황이다. 다만 기술혁신이 쉬 이뤄지기는 어렵고 상당한 재원도 소요되기에 당분간 앞서 언급한 대로 석유생산과 수급에서 중동 지역의 우위가 지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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