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4. 전력산업구조개편의 결과

한전이 중국내몽고에 진출해 발전을 시작한 풍력단지 전경. 만약 10년전 전력민영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현재의 한전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한전의 세계화 플랜은 전력민영화를 압도하는 신개념이 되고 있다.<사진제공=한국전력>  

실패한 영국식 구조개편, 한국에 상륙하다

IMF 구제금융, 공기업매각 요구에 정부 항복
2001년 캘리포니아에 노사정현지조사단 파견
영·미·캐나다 실패 알면서도 정부 민영화 강행

 
전력산업 구조개편 10년이 지났다. 2001년 4월 한국전력 발전부문이 화력발전소 5개사, 수력원자력 1개사, 전력거래소로 각각 분할됐다. 정부는 2단계로 배전부문 분할을 시도했으나 전국전력노동조합의 반대로 2003년 추진을 하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9월15일 블랙아웃 직전까지 가는 전력대란이 발생했다. 이에대한 원인분석과 책임공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정부가 잘못한 것인지, 단지 몇몇 전력책임자의 잘못인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진행과 관련,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사를 시리즈로 독점 게재한다.                 /편집자 주


1997년 겨울,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대한민국은 건국 후 처음으로 국가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흔히 IMF 사태라고 불리는 사상 초유의 경제위기가 터진 것이었다.

사실상 우리나라를 접수한 IMF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몰아붙였다.

IMF의 요구는 간단했다. IMF는 구제금융을 받는 모든 정부에게 우선 이자율과 환율을 대폭 올려서 시중의 돈을 은행으로 회수하고 지나친 부채를 떠안은 은행과 부실기업은 과감하게 정리함으로써 단기적으로 빌린 돈을 갚을 능력이 되도록 회생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국가부도사태 와중에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전력, 가스, 통신, 철강 등 제값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공기업이 매각대상에 올려졌다.

1999년 1월, 당시 산업자원부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기본방향’이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대외적으로는 영국을 필두로 전력산업 자유화가 세계적 추세이며, 대내적으로는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외국인 투자촉진이 필요하므로 전력산업을 자유화해야 한다고 돼 있다.

또한 구조개편을 3단계로 나눠 우선 한전에서 발전부문을 분리한 후 경쟁시킨 다음 배전부분 역시 분리 후 도매시장에서 양방향 도매경쟁을 완성한 후 최종적으로 판매부문에 자유화를 도입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전력회사 선택권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각 단계별로 한전에서 수직분할된 발전과 배전회사들은 동시에 수평적으로도 여러 회사로 분리된 후 각각 민영화를 시키겠다는 것이 구조개편계획의 내용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2009년까지 완료한다고 돼 있었다.

산자부는 이런 분할, 민영화, 경쟁체제 구축을 통해 독점체제를 경쟁체제로 바꿈으로서 산업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보장되며, 또한 공기업 독점구조를 민간 주도의 체제로 바꿈으로서 산업을 창의적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구조개편을 추진한 여러 나라에서 전기요금 인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전기요금도 이 과정에서 낮아질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나라가 따라야 할 모델로 선택한 영국식 구조개편, 즉 수직통합 전력산업 구조를 발전-송전-배전으로 나누고 다시 각 부문을 수평적으로 여러 회사로 나눈 다음 민간, 특히 해외자본에 매각한 후 독립적인 도매시장에서 완전경쟁을 시킨다던 계획은 한국 정부가 구조개편을 결정한 1999년 무렵 이미 외국에서는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

남이 앞서 달리다 진창에 빠질 쯤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달려 보기로 결정한 코미디와 같은 일이었다.

1990년에 구조개편을 시작했던 영국은 90년대 말이 되자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우선 실시간 생산과 공급이 생명인 전력산업 특성상 매일 매일의 전력거래를 완전시장경쟁을 한다던 개념 자체가 잘 먹혀들지 않았다.

발전회사는 얼마만큼을 팔수 있을지 몰라서 불안했고 배전회사 역시 다음날 자신들이 필요한 전기를 살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었기에 현물시장에서 전력을 사고파는 제도에 크게 불만을 갖게 됐다.

영국식 시장에서는 원칙적으로는 풀시장 밖에서는 전력거래가 허용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민영화된 여러 발전회사와 배전회사는 장외거래를 통해 쌍무계약(Bilateral contract)을 체결하고 전기를 직거래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정부는 2001년, 공식적으로 풀시장 이외의 전력거래를 허용하고 동시에 발전과 배전회사의 거래실패 위험을 분산할 수 있도록 헤징을 비롯한 다양한 거래기법을 인정하는 새로운 전력거래기준, 즉 NETA(New Electricity Trade Agreement)를 발효했다.

NETA 체제가 시작되자 현물시장에서 거래된 전력량은 전체 전력생산량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짐으로써 사실상 영국식 의무적 풀시장은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또한 영국의 주요 발전과 배전회사의 소유권이 처음에는 미국계 기업으로, 그 후에는 프랑스와 독일계 기업의 손으로 팔려나가는 국부유출 사태도 발생했다. 2008년 기준으로 영국 전체 발전시장의 시장점유율은 90%에 육박함으로써 사실상 카르텔 구조를 갖추었고, 이 중 4개 회사는 프랑스(EDF), 독일(RWE, E.ON), 스페인(Iberdrola)와 같은 외국계로 넘어갔다.

이들은 영국 정부의 정책에도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말 그대로 외국계 기업들이다. 영국 발전시장의 주도권은 완전히 외국인들이 장악했다고 볼 수 있다.

2003년과 2008년 사이 전기요금은 93% 인상됐다. 이런 요금폭등 속에 총 소득의 10% 이상을 에너지소비에 지출하는 에너지빈곤층(Energy poor)이 5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총체적 실패였다. 이제 영국은 에너지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또 값싼 북해유전이 고갈되는 시점에서 전력산업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처지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시장실패는 대서양 건너 미국 캘리포니아와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터져 나왔다. 1996년 주 전체의 전력시장을 자유화하고 3대 전력회사의 발전설비를 발전전문회사에게 매각하게 했던 캘리포니아에서는 1998년부터 전력시장을 완전 자유화했다. 도매경쟁을 도입하면서 전력가격이 급변동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주정부는 남쪽 샌디에고시 지역을 제외한 전체 캘리포니아의 전력소비자가격은 3년간 동결시켰다.

급격한 시장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문제는 2000년에 들어서면서 발생했다. 2년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되던 캘리포니아 도매전력가격은 2000년 가을에 들어서면서 급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초가 되자 도매시장의 발전요금은 1999년 대비 세배 이상 뛰어 올랐다.

이렇게 되자 발전설비를 모두 매각하고 도매현물시장에서 전기를 구입해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던 전력회사 가운데 소매요금이 동결됐던 Pacific Gas & Electricity와   Southern California Edison은 막대한 영업손실로 파산상태로까지 몰렸다.

유일하게 도매요금을 소매가격에 전이하는 것이 가능했던 San Diego Gas & Electricity가 전기를 공급하던 샌디에고 지역은 소매요금이 그대로 폭등하게 되면서 주민들이 큰 고통을 겪게 됐다.

PG&E와 SCE에게는 소매요금을 한시적으로 묶은데 비해 SGE의 소매요금을 풀어준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자유화를 시행하면 많은 발전회사가 시장에 진입하는 경쟁효과로 전기요금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주정부는 규모가 훨씬 컸던 PG&E와 SCE가 소유했던 발전소의 회수하지 못하는 초기 투자비, 즉 좌초비용(Stranded cost)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기에 요금을 일정 기간 동결해 준 반면, 발전소 전체를 고가에 매각한 SGE는 충분히 좌초비용을 회수했다고 판단했기에 전기요금을 완전 자유화했다.

2001년 1월이 되자 결과는 똑 같았다. 도매요금은 급등했지만 이를 소매요금으로 전가하지 못한 PG&E와 SCE은 파산선언을 했고, 소매요금에 전가시킨 샌디에고 지역에서는 그 부담이 고스란히 주민들에게로 넘어갔다.

그 결과 주정부는 같은 해 2월, 전력거래소였던 CPX(California Power Exchange)를 사실상 정지시키고 주정부가 직접 발전회사에서 전기를 구입, 배전회사에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근본 원인은 발전회사들의 담합에 있었다. 당시 전력대란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LA타임즈의 낸시 보겔 기자는 엔론, 미란트, AES와 같은 발전회사들을 ‘시장약탈자’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로비자금이 동원된 전력산업 자유화는 궁극적으로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의 단기 투기 놀음에 놀아나서 탄생했고, 발전회사들은 대체품이 없는 전력 생산을 고의적으로 줄임으로써 도매가격 폭등을 유도했다”고 폭로했다.

발전회사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가동을 중단해도 이미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에 맡긴 상태에서 주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파국적인 사태를 맞이했다는 것이 낸시 보겔의 결론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이런 사실을 놓고 당혹해 하면서 노사정 공동 현지조사단을 한전과 전력노조에 제안했다. 필자는 그 때 조사단에 참여해서 2001년 2월 캘리포니아를 방문, 주정부 규제기관(CPUC)과 주요 발전회사의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이들은 캘리포니아 시장설계의 실패 때문에 전력대란이 발생했다는 주장을 했다. 즉 도매가격은 자유화한 반면 소매가격은 동결시킨 이중적 가격구조의 문제, 현물도매시장의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헤징제도 부재가 구조적인 문제였고, 평년 보다 추원 겨울과 실리콘 밸리의 급속한 경제활동 증가에 따른 수요 급등이 전력사태의 원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도 이와 같았다.

필자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우선 이중적 가격제도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이 이중적이던 PG&E와 SCE은 파산한 반면 SGE 지역의 소비자들은 직접적으로 소매가격 인상이라는 폭탄을 맞았다.

이는 도매가격과 소매가격이 연동되면 소비자가 피해를 입고 연동되지 않으면 송배전을 담당한 전력회사가 피해를 입는, 발전회사만 폭리를 취할 수밖에 없던 구조개편 자체의 모순에서 터져 나온 사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모델이 됐던 각 지역에서 자유화의 실패 소식이 들려 왔지만 김대중 정부는 전력산업 민영화를 그대로 밀고 나갔다.

2000년 12월 전력산업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1년 4월에는 첫 단계 구조개편인 발전부문과 계통운영을 6개 발전회사와 전력거래소로 각각 한전에서 분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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