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3. 전력산업구조개편의 개념과 시작(하)

전력민영화 바람 IMF 국내 유입

뉴질랜드 시작으로 미국·캐나다·호주 편승
민간시장서 투명한 전력거래 실제론 불가능

전력산업 구조개편 10년이 지났다. 2001년 4월 한국전력 발전부문이 화력발전소 5개사, 수력원자력 1개사, 전력거래소로 각각 분할됐다. 정부는 2단계로 배전부문 분할을 시도했으나 전국전력노동조합의 반대로 2003년 추진을 하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9월15일 블랙아웃 직전까지 가는 전력대란이 발생했다. 이에대한 원인분석과 책임공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정부가 잘못한 것인지, 단지 몇몇 전력책임자의 잘못인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전력산업 구조개편 진행과 관련,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이면사를 시리즈로 독점 게재한다.                 /편집자 주 

2001년, 영국 정부는 새로운 에너지거래제도, 즉 NETA를 발표했다.

NETA의 핵심 내용은 당초 모든 전력거래를 풀시장에서 하도록 했던 방침에서 한 발 후퇴, 발전회사와 배전회사가 전력을 직접 거래하는 쌍무계약(Bilateral Contract)을 허용하는 것에 있었다.

이 변화는 전기라는 상품, 아니 서비스의 특성상 무조건 현물시장에서 거래하도록 강요하는 제도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왔다.

전기의 가장 큰 특성은 저장이 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저장이 불가능하므로 실시간으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또한 전기는 한 순간도 공급이 끊어지면 안되는 필수서비스이다.

이런 물리적 특성은 매일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회사나 도매시장에서 전기를 사서 고객에게 공급하는 배전회사 모두에게 큰 위험을 안겨준다. 발전회사에게는 현물 도매시장에 입찰한 전기가 비싸서 판매되지 않을 위험이 있고 배전회사에게는 반대로 입찰한 구입가격이 너무 낮아서 전기를 못 사게 될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발전회사나 배전회사는 마음 편하게 안정적으로 거래상대를 정하고 전기를 보내고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커진 것이다. 그럴수록 도매시장은 더 불안정해지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그결과 NETA에서는 발전회사와 배전회사가 직접 1년 또는 2년 단위의 쌍무계약을 맺는 것은 물론, 위험 회피가 가능하도록 선물, 옵션 등이 허용됐다. NETA 도입 이후 전체 전력거래량의 90%가 쌍무계약으로 바뀐 사실을 보면 전력시장을 역동적으로 일일 입찰시장으로 설계했던 리틀차일드 교수의 생각이 비현실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 지역의 전력회사까지 포함하는 BETA로 이 제도를 확대했다. 이후 의무적 풀시장은 실제로는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거래의 인덱스 효과만 보여주는 신세로 전락했다.

특히 발전회사와 배전회사 사이의 쌍무계약은 양자 계약이므로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 자유화된 시장에서 투명하게 전력을 거래하겠다던 구조개편의 애초 목표는 사라지고 말았다.

시장에 의한, 시장을 위한, 시장의 작품

영국의 구조개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전세계로 퍼져나간 전력산업 자유화의 기본 모델이 바로 이 영국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도매시장과 쌍무계약을 허용한 자발적 풀시장(Voluntary Pool), 고립된 지역별 전력계통망을 연결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북유럽의 노드풀시장, 미국의 PJM 등은 영국식과 차이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나간 모델이 바로 영국식 구조개편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축구, 럭비, 테니스, 그리고 광우병 외에도 민영화와 자유화도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제일 먼저 영국식 모델이 상륙한 곳은 뉴질랜드였다. 뉴질랜드는 1990년대 중반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국가 전체를 민간 수익모델로 바꿔 나갔는데 전력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뒤이어 미국, 호주, 캐나다 역시 이런 자유화 대열에 합류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앵글로색슨의 후예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 훨씬 더 강한 모험심이 핏속에 흐르고 있음을 전력산업 자유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전기의 원조, 미국 전력산업의 민주적 규제

다른 나라들의 설명은 생략하고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나라인 전기의 종주국인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미국은 시민들이 개척을 하면서 국가를 만들어 간 나라답게 민간사업자들이 전력산업을 개척해 나갔다. 미국 전력산업 역사에서 에디슨의 비서 출신으로 나중에 미국 전력산업을 주무르는 큰 손으로 성장하는 사무엘 인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지주회사를 통해 전국으로 전력과 철도망을 확충해 나가며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전력망산업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그가 세운 에디슨 커먼웰스를 포함한 8개 대형 전력회사가 1932년에 이르자 미국 전체 전력시장의 73%를 차지하는 독과점을 통해 막대한 초과이윤을 올리는 것을 경계한 당시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때마침 불어 닥친 대공황 극복을 명분으로 인슐을 비롯한 전력회사들에게 철퇴를 내린다.

1935년, 미국 의회는 공공사업지주회사법(PUHCA)을 제정하고 전국 단위에서 사업하는 대형 전력회사들을 주별로 분리하는 대수술을 시작한다. 연방정부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를 통해 엄정하게 전력회사의 독과점을 막는 한편, 각 주정부는 공익사업위원회(PUC)를 세우고 주 내의 전력산업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전력산업은 비록 사업 주체는 민간기업이지만 요금을 비롯한 모든 영업활동을 연방과 주정부가 이원화된 규제시스템으로 철저하게 관리감독하는 민주적 규제(Democratic regulation) 체제 아래 놓이게 된다.

월스트리트가 원한 전력산업 자유화

PUHCA 체제 아래 평온하게 정부 감시 하의 지역별 민간독점 체제를 유지해 오던 미국 전력산업에 자유화의 바람은 대서양을 넘어서 불어 왔다.

영국식 자유화를 목격한 미국의 자본가들은 1920년대 철도, 1980년대 항공, 1990년대 은행자유화에 뒤이어 마지막 남은 독점산업인 전력산업 자유화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결과 연방의회는 1992년 연방전기사업법 개정을 통해 주별 경계를 넘어서는 송전망 건설을 통해 단일전력망 구축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각 주정부에게 지역별 요금격차 해소를 위해 전력망 연계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주별 독점체제를 허물 것을 권유했다.

가장 먼저 자유화에 뛰어든 주는 캘리포니아였다. 캘리포니아 의회는 소위 ‘피스 법안’이라고도 불리는 전력산업 자유화 법률을 1996년에 제정하고 주를 삼등분하고 있던 세 전력회사(Pacific Gas & Electric, Southern California Edison, San Diego Gas & Light)의 발전설비를 최소 50% 이상 매각, 전력시장(Cal-ISO) 개설 등을 추진했다.

그리고 1998년 1월 영국과 똑같은 강제적 풀시장을 통해 주의 모든 전기를 거래하도록 조치했다.

캘리포니아에 이어 뉴욕, 미시간 등 덩치가 큰 주들은 앞다투어 전력시장 자유화 시동을 걸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캐나다에서도 2002년 온타리오주를 시작으로 영국식 전력거래 모델을 도입했다.

역시 같은 앵글로색슨 국가인 호주에서도 빅토리아주와 뉴사우스웨일즈주가 서로 경쟁하듯이 영국식 분할, 민영화, 자유화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와 같은 전력시장구조개편의 소용돌이는 IMF 구제금융 체제에 놓인 우리나라에도 상륙, 1999년 당시 산업자원부는 ‘전력산업구조개편 기본계획’을 발표했고 이어 2000년 12월 ‘전력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1년 4월1일 독점 공기업 한국전력공사의 발전부문은 모두 6개의 발전회사로 분리됐고 민영화를 기다리게 됐다.

영국을 시작으로 휘몰아친 구조개편, 자유화, 규제철폐, 분할, 민영화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말 그대로 세계적 흐름으로 전 지구에 몰아닥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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