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컬럼] 김신종의 에너지 이야기 - ④ 석유의 지정학
[연재컬럼] 김신종의 에너지 이야기 - ④ 석유의 지정학
  • 김신종 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 승인 2019.04.04 01:2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너지신문] 김신종 고려대학교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는 행정고시 22회 합격 이후 산업자원부 및 환경부 등에서 오랜 기간 공직에 몸담았던 에너지 분야의 전문가다. 본지는 에너지의 기원에서부터 미래 에너지 전망에 이르기까지 김신종 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는 ‘김신종의 에너지 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주

▲ 김신종 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 김신종 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지정학(Geopolitics)은 세계 차원의 사건과 전략 통찰에 기여하는 ‘지리학과 정치학이 결합된 이론틀’이다. 20세기에도 크고 작은 전쟁들이 일어났지만 일반인들은 그 배경이나 이유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쟁의 이면을 관통하는 한 맥락으로 세계의 에너지자원을 통제하려는 패권지향 국가들의 전략이 있었다.

영·미 간의 패권 교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석유공급의 불확실성이 제기되자 1914년에 영국 의회는 9600km 떨어진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 남서쪽에서 석유를 발견한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APOC)’를 국유화하는 의안을 표결, 승인했다. 이 결정을 계기로 영국은 해외석유채굴권과 석유공급을 국가의 주요 정책과제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종전 이후 중동 분할책인 ‘사이코스-피코협정’을 조인했는데, 여기에는 영국의 원려심모가 담겨져 있었다.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따라 독일과 명운을 건 전투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영국은 140만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켰으며, 1918년 종전 이후에도 중동 전역에 100만명 이상의 병사들을 계속 주둔 시켰다.

영국은 요르단에서 동쪽으로 이라크와 쿠웨이트까지의 석유매장 지역을 장악하며 하이파에서 바그다드까지 연결되는 철도 부설권을 차지했다.

프랑스는 대(大)시리아지역(시리아, 레바논, 요르단)과 터키의 석유채굴권과 이라크의 모술지역 통제권을 차지했으며, 이 조약에 동의한 제정러시아에게는 오스만령 아르메니아와 예레반 남서쪽의 쿠르디스탄지역을, 이탈리아에게는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의 산악지역 해안선과 도테카니소스제도를 약속했다. 결국 오늘날 중동지역 원유매장지의 거의 대부분을 영국이 차지했던 것이다.

1920년대 초에 이르러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제국을 받쳐주던 세 기둥(해군력, 금융, 전략원자재)이 흔들리던 영국은 독일과 러시아의 연합 가능성을 의식, 1927년에 프랑스와 사이코스-피코협정을 변경해 미국을 중동지역에 끌어들이기로 합의했다.

1928년 7월에 Englo-Persia, Royal Dutch Shell, New Jersey Standard 등 영국과 미국의 석유회사 대표들 간 ‘아크나카리협정(일명 Red-Line협정)’이 체결되며 훗날 ‘세븐시스터즈(Seven Sisters)’로 불리게 되는 강력한 석유카르텔이 태동했다.(Red Line은 터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를 둘러쌌는데 영ㆍ미 양국의 석유업계는 1960년대 말까지 거의 40년간이나 지속된 영역분할을 이때 결정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미계의 메이저들이 중동을 포함한 세계의 석유시장을 차지한 가운데 전개됐다. 독일, 일본, 이태리 등 추축국들은 이들 메이저들로부터 석유를 공급받았다. 전쟁 이전부터 이미 석유공급이 비교열위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 비교열위의 타파가 추축국들의 주요 목표였기도 했다.

미ㆍ소 주도의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71년, 국력의 한계를 느낀 영국은 미국을 의지하며 ‘사이코스-피코협정’ 이래 주둔시켜온 수에즈운하 동쪽의 영국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중동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당시 베트남전에 주력이던 미국은 병력 파견 대신 ‘위임전략’을 선택했다.

이란의 팔레비왕조와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왕조에게 군사원조를 지원하고, 이들이 이 지역에서 서방 이익의 보호자로서 그 역할을 하게 했다. 미?영이 구획한 석유의 지정학은 이전보다 약화되됐지만, 계속 유지됐다.

이후에도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석유를 이용했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은밀하게 도모한 저유가 정책은 소련과 공산주의 블록의 종말을 촉진시켰다. 석유는 소련의 외화 공급원으로는 거의 유일한 자원이었는데, 저유가에다 ‘스타워즈’ 경쟁까지 겹쳐 1991년에 이르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은 더 이상 체재를 지탱할 여력이 없어 결국 해체됐다.

일·러·중의 패권 추구

일본은 1841년 명치유신 이래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성장했는데 그 과정에서 늘 문제시되던 석유공급원을 확보하려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를 점령했다. 이에 미국은 1941년 7월 ‘대일본 석유수출 금지조치’를 시행했다. 수급 핍박에 시달리던 일본은 불리한 여건에서도 1941년 말 하와이 진주만 미해군기지를 기습했으나, 결국 패배하게 된다.

강국이 되고 싶은 욕망에다 식량, 물에 이어 에너지자원이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투철하게 아는 일본은 이후 해외자원개발이든 신재생에너지 개발이든 한번 시작하면 중도에 흐지부지한 적이 없다. 석유의 중동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오래 계속하고 있고, 에너지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해군력을 키우려는 일본의 집념은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러시아는 일찍이 카스피해의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페르시아를 간섭하고 중앙아시아의 자원을 통제했다. 구소련 정부는 바쿠유전 이외 카스피해 개발을 금지시켜 카스피해의 풍부한 석유자원은 30년간 형세의 변화를 기다리는 처녀지로 남아 있었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부터 새로운 개발의 전기를 맞았다.

비록 서방세계의 자본이 대거 투입됐지만 카스피해 지역에서 생산된 석유는 지금도 CPC파이프라인(바쿠-노보로시스크)을 타고 러시아로 대량이 흐르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생산국으로 부상한 러시아는 유럽에 이어 아시아에서도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현재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나홋카항 인근 코즈미노 수출터미널까지 운송해 갈 길이 4700km의 대규모 송유관을 건설하고 있으며, 한ㆍ중ㆍ일 3국은 이 송유관을 자국에 유리한 노선으로 건설토록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러시아정부와 장기간에 걸쳐 협상을 벌이고 있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알제리, 카타르, 리비아, 이란 등을 묶어 OPEC과 유사한 ‘천연가스 수출국 카르텔’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1949년에 집권한 중국 공산당 정권은 곧 제3세계의 연합세력인 ‘비동맹 회의’의 맹주가 됐다. 중국은 아프리카와 남미지역 국가들에 ‘은탄외교(銀彈外交)’를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자원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최근 카스피해 유전에서 중국까지의 파이프라인 건설사업이나 미얀마 가스전에서 중국까지의 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사업은 그 후속이며, 주지된 대로 '굴기의 사례'이자 그 확대의 방편이다. 중국의 원유 등 자원 확보에 대한 조급증과 탐식은 앞으로 점점 더 노골적인 형태의 지정학 양상으로 부각될 것이다.

20세기 이래 세계 각국은 에너지원의 확보가 국가의 존속과 발전에 ‘필비(必備) 물망(勿忘)’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각성하며 전력투구하고 있는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수진 2019-04-04 10:20:54
점점 재밌어지네요
유익한 내용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