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신문] “요즘 정유사는 절대 ‘을’입니다”

최근 만난 정유사 관계자들은 입을 맞춘 듯, 이말을 반복했다. 국내외 공급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구매자의 요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3분기 정유업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호실적을 기록했다. 내수 소비는 늘었고 수출 물량도 그대로다. 재빠른 체질 개선과 다년간의 운영 노하우가 버무려지면서 오히려 위기대처 역량을 쌓았다는 평가다.

반면 석유유통업계의 상황은 다르다. 이전에도 어려웠고, 지금은 더 어려워졌다. 주유소업계의 매출액 대비 영업익은 평균 1%다. 올 상반기 109곳이 문을 닫았고, 돈이 없어 폐업조차 못하는 휴업소도 500곳에 육박한다.

일반판매소업계는 더하다. 15년 동안 60%의 업소가 폐업했고, 현재 전체 영업소의 45%가 월수입 100만원 미만으로 조사됐다. 알뜰주유소업계도 고전 중이다. 자생력 확보의 견인차로 기대했던 화물복지카드가 정유사들의 할인구간 확대 상품 출시라는 ‘맞불’로 유명무실해졌다.

상황 타개를 위해 이들 업계는 최근 유류공동구매 등 대안을 추진하거나 시장 정상화를 위한 전·폐업지원 등 정책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실현되기까지 장벽이 많고, 장기간 약화된 업계의 경쟁력을 회복시킬 정도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저유가 위기에서 양 업계의 다른 현재는 자본과 규모의 막대한 차이에서 기인한다. 원유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석유제품의 대부분은 국내산일 정도로 생산력을 갖췄고, 이를 바탕으로 수천억원의 손실에도 버틸 수 있는 자본력을 쌓은 정유사의 저력은 막강하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에 따라 업황이 갈리고, 10원 차이에 매출이 급변하는 하부유통업계는 자본과 규모를 쌓기는커녕 유지하기도 어렵다. 특히 시설개선자금 지원 등 정유사와의 종속관계는 자체 경쟁력 확충에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자처하는 것은 동정과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이다. 진짜 ‘을’들은 후폭풍이 두려워 숨어 있기 일쑤다. 때문에 약자의 이야기는 찾아 들어야 한다.

약자의 가면을 쓴 ‘갑’, 그 뒤 외면당한 진짜 ‘을’, 석유업계에 진정한 갑과 을이 누구인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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