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업계 의견 수렴 없이 일방 추진…예고된 혼란
‘독과점’ 인증업체…업무처리 늦고 비용 부담만 가중
업계 POS 연동ㆍ주유기 개발까지 제도 유예 요청

[에너지신문] 지난 7월 21일 IC 단말기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촉발된 주유소, 충전소의 단말기 대란이 석 달째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에서 정부가 업종의 특수성이나 준비상황을 고려치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여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업계의 혼란과 소비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의 발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7월 21일 IC단말기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주유소, 충전소 업계의 혼란이 확대되고 있다. 사진은 기존 셀프주유소 주유기에 설치된 카드결제 단말기.

IC단말기 설치 의무화, 무엇이 문제인가?

금융위원회는 기존 마그네틱 카드(MS) 불법복제에 따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지난 1월 20일 여신전문금융업법 일부를 개정해 공포, 7월 21일 이후부터 신규가맹점에 IC결제 단말기 설치를 의무화하고 기존 MS거래는 중단하도록 했다. 기 가맹점은 단말기 신규설치 또는 교체시 IC카드 단말기 사용을 우선 적용해야 한다.

기술표준에 어긋나거나 금융당국에 등록되지 않은 단말기를 설치하면 가맹점은 최고 500만원, VAN사는 최고 5000만원의 과징금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제도 시행 이후 준비 부실로 시장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는 지적이 산업계 전반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IC단말기 기술표준 확정이 늦어지며 단말기 품귀현상으로 신규 가맹점들이 개점을 미루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것. 등록 인증기관의 부실한 업무처리도 도마에 올랐다.

IC단말기 기술표준은 지난 5월에야 확정됐다. 7월부터 신규가맹점에 기술표준을 충족한 IC단말기가 제공돼야 하는데 표준 자체가 양산이 불가능한 시점에 공포된 것. 또한 5월 이전에 개발된 IC단말기는 기술표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불법제품이 되면서 수백만개에 달하는 기존 단말기가 폐품으로 전락했다. 이 단계에서 이미 단말기 품귀 현상이 예고된 셈이다.

인증을 담당한 업체들의 부실한 업무처리는 단말기 대란을 더욱 부추겼다. 개정된 법령에 따르면 신규 단말기를 설치하거나 교체하는 가맹점은 여신금융협회가 마련한 기술표준에 따라 한국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KTC), 한국아이티평가원(KSEL)에서 인증 받은 단말기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보안표준 제정이 늦어지고, 뒤늦게 인증 작업을 준비하는 등 정부의 부족한 준비 탓에 인증 업체들이 업무 폭주로 처리가 지연되며 시장의 혼란을 키웠다. 국내 16개 밴사가 한꺼번에 인증을 신청하면서 제품 인증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인증기관이 사실상 독점 형태로 운영됨에 따라 비용 부담 상승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인증 비용과 횟수를 늘려 밴사와 제작사의 부담이 늘었고, 이는 결국 가맹점주에게로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다.

기존 결제 자료 처리 시스템과 연동되는 프로그램 개발도 지연되고 있고, 결제시 잦은 오류 발생도 속출하고 있다. 특히 주유소, 편의점, 프랜차이즈 업종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결제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사업자는 물론 소비자들까지 불만이 가중되고 있는 분위기다.

여신업계 관계자는 “표준 제정 지연 등 제도 준비가 미비했음에도 정부가 의무화를 밀어붙인 결과, 비용 절감은커녕 부담만 증가시켰다”고 꼬집었다.


‘단말기 대란’ 직격탄 맞은 주유소‧충전소

주유소‧충전소 업종은 이번 단말기 대란에서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다.

업종 특성상 정유사와 밴사 차원에서 업소 POS와의 연동 프로그램 개발 및 주유‧충전기 부착 IC전용 단말기 개발 등이 필요하나 아직 미개발 상태이다 보니 일선 주유현장에서 많은 혼란과 불편이 초래되고 있으며, 주유소와 소비자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

현재 주유소에 신규설치된 IC인증 단말기의 경우, 주유기에서 주유한 자료의 POS 전송 및 결제한 자료가 IC카드 단말기와 연동돼 있지 않다.

주유기 금액 및 주유량, 재고량 등 결제처리자료를 일일이 수동으로 입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를 위한 추가인력 채용 등 비용 부담 및 업무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

사업자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불만도 높다는 전언이다.

주유소와 충전소는 할인카드, 멤버쉽 적립카드, 유류보전카드 등이 매우 보편화된 시장이다. 하지만 카드사의 연계카드와 정유사의 카드가 연동이 되지 않아 수동으로 처리하면서 결제 지연과 정보유출 우려로 소비자들의 항의가 다수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인건비를 줄여 원가를 절감하는 셀프주유소의 경우 POS연동 미비로 인해 추가로 주유원을 고용, 수동으로 입력 및 결제해야 해 가장 큰 불편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말기 자체도 부족한데다가, 수동 작업이 불가피해 원가 절감은커녕 비용부담만 늘었다는 것.

업계는 사실상 셀프주유소 개업이 어려워 지난 7월부터 신규 개점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무엇보다 업계는 이같은 상황이 충분히 예견됐음에도 정부가 사전 의견 수렴 한 번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현재의 시장 혼란의 책임까지 업계에 전가하고 있다는 데 분노감을 감추지 못했다.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법 시행에 앞서 주유소 업종 관련 당사자들을 모아 놓고 철저한 대책을 논의하고 준비사항을 점검한 적이 없다.

제도가 시행되니 기술 및 보안 표준을 제도 시행 코앞에 지정해 단말기 품귀 대란을 야기한 정부가 이제 와서 정유사와 VAN사, 주유기 제작사 등의 늑장 대응 때문에 혼란이 빚어졌다며 책임을 전가하는 듯 한 인상이라고 성토했다.

주유소 업계 관계자는 “전체 카드수수료의 10% 이상을 주유소 가맹점에서 거둬들이면서도 주유소 사업자들의 혼란과 소비자 불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심각한 상황을 인지한 한국주유소협회와 한국석유유통협회는 지난달 정부에 최소 6개월의 제도 유예를 요청한 상태다.

주유기 업체가 단말기를 개발하더라도 정유사 POS와 연계 및 작동과정의 오류를 줄이기 위한 테스트 등을 거쳐 실용화되려면 최소 3~6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셀프주유소의 경우 POS 프로그램 개발 후 IC카드용 셀프주유기 개발 및 보급까지 이뤄져야 하는 만큼 보다 보다 장기간의 유예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석유유통협회 관계자는 “정유사들이 주유소 POS와의 연동 프로그램 개발을 완료하기까지 최소 6개월의 제도 유예가 필요하고 셀프주유소의 경우 주유기 개발까지 고려해 최소 6개월에서 최대 3년까지 IC단말기의 적용을 유예시켜 줄 것을 촉구한다”며 “주유소 가맹점의 IC카드 단말기 설치 및 거래방법에 대한 사전 철저교육 및 홍보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도 시행 3개월 째, 갈수록 혼란이 확대되고 있는 주유소‧충전소 업계의 IC 단말기 대란에 대해 정부가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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