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수 전자정보인협회 회장

일반 대중 넓은 공감대 형성이 우선
우리 사회 여건 고려한 검토 필요해

징벌(懲罰)이란 뒷일을 경계하는 뜻으로 벌을 주는 것인데, 특히 부정·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형무소에서 범칙(犯則)한 죄수를 징벌하던 어두운 독거감방(獨居監房)을 징벌방(懲罰房)으로 불렀다. 그래서 부정·부당한 행위에 대해 제재(制裁)를 가하는 징계(懲戒)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징계하는 응징(膺懲)과 같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흔히 특수한 부분(部分)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것을 어지럽힌 자에 대하여 과하여지는 제재를 지칭한다.

손해배상(損害賠償)은 법률의 규정에 따라 남이 입은 손해를 메워 주는 것이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이란 가해자가 의도적이거나 악의적으로 불법행위를 행하는 경우에 한하여 피해자에게 실제로 발생한 손해 외에 부가적으로 인정되는 배상을 말한다.

이를테면 타(他)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본보기로 중한 처벌을 하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사고(思考)나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사람을 징계하여 여러 사람을 격려하는 징일여백(徵一勵百)의 정신인 것이다.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활발히 논의 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핫 이슈이며 뜨거운 감자로 취급하고 있다. 실은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 1750년경의 바빌로니아 왕의 법령제정으로 유명한 함무라비(Hammurabi)법전과 기원전 1400년경의 히타이트(Hittite)법전, 모세율법의 헤브라이법전 등 고대법에서는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실제로 입은 손해액의 몇 배를 배상하게 하는 배수적(倍數的) 손해보상이 규정되어 있었다. 성경에서도 ‘눈은 눈으로(an eye for an eye), 이는 이로’ 갚는 복수법, 즉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talion)이 나온다.

장래를 경계하기 위해 벌을 과하는 근대법의 징벌적 손해배상은 처음부터 영국법에 의하여 시작되고 발전된 것으로 되어 왔다. 영국에서는 1275년 수도자에 대하여 불법으로 권리를 침해하는 자는 2배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배수적 손해배상을 결정한 사상 최초의 법률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영미법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채택하여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영미법(英美法)이란 영국법률 및 그것을 계승한 미국 법률의 총칭이다. 판례법과 관습법을 주로하며 불문법(不文法)이 중심이 되는데, 이는 대륙법(大陸法)과 대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1년 3월29일부터 시행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서 “취득한 기술 자료를 유용함으로써 손해를 입은 자가 있는 경우에는 그 자에게 발생한 손해의 3배를 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배상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의 개념을 최초로 명문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징벌적 손해배상은 본디 영미법에서 발전된 제도이며,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영미법과는 다른 대륙법을 모태로 하고 있다. 대륙법(大陸法)은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대륙의 법이다. 로마법의 영향이 강하고 성문법(成文法)을 중심으로 한다.

다수의 우리나라 법률은 일본 법률을 근간으로 하였고, 일본 법률은 대개 독일 법률을 모태로 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이나 미국 등의 국가에서 발전한 영미법계와 독일과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태동하고 발전한 대륙법계는 법률의 맹아, 태동과 형성, 그 과정과 배경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 형성이 다른 법제도하에서 기존의 법체계를 일체 고려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오히려 사회적 혼란이나 문화적 충돌을 가중시킬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리 미국에서 생성되고 발전한 좋은 법률이라 하더라도 문화와 습속이 전혀 다른 이쪽 다른 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거나 잘못되면 반대로 커다란 독(毒)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징벌적 손해배상이 기업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는 제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잖아도 우리나라에서는 ‘경제민주화다’ ‘일자리창출이다’ 하면서 대기업에 대한 일반의 눈길이 따갑고, 기업하기에도 그리 좋은 환경이나 대중의 정서도 아직은 곱지 않고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울 수 밖에 없다.

2002년 7월1일부터 제조물책임(PL)법이 시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행법령상 우리나라 대부분의 손해배상은 손해를 입은 사람이 손해를 가한 가해자에게 자신이 입은 손해를 입증하여 청구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비전문가인 피해자가 전문가를 상대로 하여 모든 피해를 입증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손해를 입증하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은 물론이고 그 절차와 과정이 복잡하고 인력과 시간도 많이 소요되므로 손해배상 청구를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거나 중간에 지쳐서 포기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이다.

그래서 지금 대두되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채택이 되어 시행된다면 소비자에게는 크게 도움이 될 것임은 확실하다. 고로 피해 소비자들은 지금보다는 훨씬 긍정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자신의 손해에 대한 보상을 주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징벌적 손해배상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먼저 토착화 할 수 있는 적당한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일반대중의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여야 한다. 기업인 및 소비자 그 외에 모든 이들의 어느 정도 합의가 있어야 한다. 무작정이고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의 시행은 많은 부작용을 낳고 기업심을 파괴하고 사회정서를 훼손(毁損)하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다.

중국 한고조(漢高祖)가 진(秦)나라를 멸한 후 센양(成陽)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약속한 3조(三條)의 법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유명한 ‘약법삼장(約法三章)’이다. 곧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남을 상해하거나 절도한자는 벌하며, 그 밖의 진(秦)의 모든 법은 폐한다’는 세 가지다. 이것은 법률은 간략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복잡하고 가혹한 법률을 폐지한다는 뜻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의 논의와 검토를 함에 있어서 사전에 필히 중요한 사항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소비자 천국인 영국이나 미국에서처럼 무한정 인정해주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서나 사정상 합당치 않을 것이다.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하는 “손해의 3배를 넘지 아니하는…”이나 ‘금융소비자 보호법(안)’에서 규정하는 “손해의 3배 범위에서…”, 그리고 요즈음 뜨겁게 대두되고 있는 PL법 개정 논의에서 수시로 거론되는 “손해의 3배”에서 “3배”의 개념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분명치 않다.

영미법계와 같은 배심원제도가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고, 직업법관 몇 사람에 의해 재판이 좌지우지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손해배상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형편 없이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법관의 과다한 권한에 따라 손해배상의 액수가 이현령비현령으로 무리하게 혹은 예상외로 축소되어 책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법적 문화의 배경이 다른 외국의 입법례를 모방하거나 단지 참조하였을 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토양과 여건을 고려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다.

소비자의 권익강화와 공정한 시장경제의 확립이라는 대전제에서 본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은 현재의 변화무쌍한 사회상에서 볼 때 환영할만하다. 무조건 반대만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혹시 우리가 영미사람들이 만든 틀 속에 우리를 우격다짐으로 아무 시비나 판단 없이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이 시점에서 냉정히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광범한 검토는 단지 법률을 만드는 기관이나 정치권이나 국회만의 일은 아니고 기업계, 소비자 그 외 NGO관계자 등이 일심협력하여 허심탄회하게 심층적인 토의를 거쳐 국민적 합의(consensus)와 합당한 분위기를 필히 창출하여야 한다.

마음이 급해 졸속으로 처리해서는 물론 아니 될 일이며 억지 춘향이 꼴이 되어서도 기업가, 소비자 당국 누구에게도 불편하고 이롭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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