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990년대 서방국 최초 경쟁체제
미주-남미-아시아 등 전세계 절반도입
다양한 정책수단 전력산업 효율성 높여

김영산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
과학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뿐 아니라, 기존의 상품의 시장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어 음악이나 영화의 유통과 소비 행태가 획기적으로 변화하였고 그로 인해 이들 시장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레코드 가게들은 문을 닫고 컴퓨터 회사인 애플이 음원 판매 시장에서 큰 손으로 등장하였다.

이북(e-book)의 등장으로 도서의 유통뿐만 아니라 출판업 자체에 지각 변동이 예고되기도 한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급 체인에서 출판사의 역할이 줄어들고, 대신 아마존과 같은 대형 온라인 유통업자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전기도 마찬가지이다.

전기가 상품화되어 널리 쓰이게 된지 백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전기의 물리적 특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전기가 생산되어 최종소비자에게 판매되기까지의 유통과 거래 형태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는 전기와 관련된 기술의 변화가 있다.

1882년 에디슨이 전기의 상업화에 처음 성공하여 전기를 판매하였을 당시에는 송배전 기술이 부족하여 소형 발전기들을 소비자 인근에 배치해야 했다.

이는 규모의 경제가 크지 않아서 경쟁적인 시장구조가 가능한 기술적 조건이었다.

또한 계량기가 개발되기 전에는 각 소비자의 전력소비량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소비자가 사용하는 전구의 수에 비례해서 전기요금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누가 전기를 더 많이 쓰는지는 구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1886년 웨스팅하우스가 고압의 교류를 이용하여 전기를 장거리로 송전할 수 있는 기술을 상업화하면서 전력산업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대규모 송배전망을 통해 광범위한 지역의 수많은 발전기들과 수많은 소비자들을 하나의 계통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런 광역 계통의 효율성으로 전력 산업은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한편 교류(AC) 사용을 강력히 반대하고 직류(DC)를 고집하였던 에디슨은 이후 전력 산업에서 주도권을 잃게 된다.

그러나 광역 계통의 도입은 전력산업의 시장구조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도 제공하였다.

광범위한 송배전망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여러 사업자가 경쟁하는 구도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복수의 송배전망을 운영하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전력산업이 소위 자연독점 산업이 된 것이다.

기술적 효율성과 독점 사이의 딜레마는 당시 시카고 전력회사 사장 사뮤엘 인설이 제시한 “규제하의 독점”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타협점을 찾았다.

대형 전력회사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전기를 독점 공급하는 대신 정부의 강력한 규제를 받거나 아예 공기업으로 운영되는 방식이다.

전기라는 혁신적인 문명의 이기를 신속하게 도입하기 위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도 이 방식을 통해 전력산업을 발전시켜 왔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전력산업이 정부의 강력한 규제 하에 놓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충분한 전력공급의 확보이다.

전기는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면 전체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아무도 전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

공급이 부족한 만큼만 소비가 억제되는 일반 상품과 다른 특징이다.

게다가 전기의 수요는 변동성이 매우 크고 반면에 전기요금은 매시간 자유롭게 변동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 기능을 통해 실시간으로 수요-공급 균형 달성할 수 없다.

가격이라는 고삐에서 벗어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누군가가 손해를 보면서도 전력을 공급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공급이 수요를 확실히 충족하도록 공급업자를 감독하는 역할을 정부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규제 하의 독점과 공급 위주의 전기 정책은 태생적으로 방만한 경영과 과다한 전력 사용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제도이며 이에 대한 비판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천연가스를 이용한 소규모-고효율의 전력생산 기술이 발달하였고 계통운영 기술이 발전하여 송배전망을 보유하지 않는 독립적인 발전사업자나 소매사업자도 계통에 편입되어 영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발전, 송배전, 판매의 분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사업자가 고속도로나 국도를 보유하지 않고도 이들 도로망을 이용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일이 전력산업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송배전망을 보유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소규모 발전사업자나 소매사업자의 경쟁력이 살아나 그동안 독점적 영역으로 인식된 전력산업에 경쟁을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더구나 최근에는 스마트그리드 기술의 발전으로 전력시장에서 실시간 수요-공급 균형이 가능해져서 공급 안정을 위한 정부 개입의 필요성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

전력거래소 운영 지역
전력거래소 운영 지역
이에 영국이 1990년대 초 서방국가에서는 최초로 전력산업에 경쟁을 도입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유럽은 물론 미주, 아시아 등 전세계 절반 이상의 국가가 경쟁체제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유럽의 전력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인 산업구조로 변모하여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핵심적 플랫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 소매경쟁이 도입되어 모든 소비자의 공급자 선택권이 주어졌고 전력회사들도 경쟁체제에 맞게 업종과 규모를 재편하면서 활발하게 경쟁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력거래소를 통해 전력을 사고파는 체제에 편입되어 있다.
 
한편, 미국은 1978년 공익사업규제정책법 개정과 1992년 에너지정책법 개정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민간기

녹색 : 경쟁도입 완료,  황색 : 경쟁도입 중단
백색 : 경쟁도입 미추진
업 진출과 규제완화가 이루어졌다.

2010년 말 현재 16개 주에서 소매경쟁 체제가 완료되었다. 아직도 중부, 동남부지역 대부분은 경쟁체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

이들 지역은 대체적으로 부존자원이 풍부하여 경쟁체제의 필요성이 비교적 낮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 심각한 전력위기를 겪은 캘리포니아 역시 매우 조심스럽게 구조개편에 접근하고 있다. 반면 텍사스 주의 경우 주택용 소비자의 69.6%가 더 낮은 요금을 찾아 전기 공급자를 변경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유럽과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전력산업 경쟁체제는 활발하게 수용되고 있다.

남미의 경우 1982년 칠레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등이 1992년부터 규제 완화를 추진하였다.

호주에서도 영국 사례를 본받아 경쟁체제 도입을 적극 추진하여 산업구조 개혁, 지역 간 계통연계 및 도매전력시장 도입을 완료했다.

아시아권의 싱가포르에서도 국가발전전략에 따라 전력시장 자유화를 추진하여 월간 1만kWh 이상의 전기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전력공급 업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10개의 지역별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기존 산업구조는 그대로 유지한 채 소매시장을 개방하는 방법으로 경쟁을 도입했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도 경제성장에 따른 전력부족 문제 해결과 투자효율성 개선을 위해 경쟁체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경쟁도입은 초기에는 수직 독점체제를 부문별로 구조 분리하거나 발전 및 판매부문의 시장을 개방하는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경쟁체제 도입 과정에서 시장지배력 문제, 가격 및 공급안정성 등의 문제가 나타났으나 다양한 정책 수단을 개발하여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발전회사와 판매회사가 장기계약을 체결하거나 수직적으로 재통합하여 단기적 가격변동에 따른 위험을 회피하고 있고 수급상황을 반영하는 요금제를 도입하여 소비자의 수요반응을 유인함으로써 전력산업의 효율성을 한 차원 높여 나가고 있다.

2000년 이후 기후변화가 전력산업의 가장 큰 현안으로 대두하면서 경쟁체제를 도입한 선진국에서는 전력시장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하여 배출권거래제(ETS),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제(RPS) 등의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세계적 추세는 규제만능주의를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각종 이해관계에 휘둘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전력과 환경 정책에게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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